안을 다스려라.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가만히 살펴보면
늘상 외부로부터의 경계를 찾아다니기만 합니다.
가만히 경계가 없을 때 조차 끊임없이 외부로부터의
자극과 경계를 찾아내고야 맙니다.
외부로부터의 경계가 딱 끊어지고 나면
무료하고 심심하여 어쩔 줄 몰라 야단인 모습들 입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우리 마음이 꼭 그렇습니다.
우리는 마음이 고요하길 바라고, 텅 비어 있길 바란다지만
현실에서는 끊임없이 외부의 자극을 찾고 또 찾아다니는 것이 어쩔 수 없는 모습입니다.
그 이유는 아상(我相)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상이란 내가 있다고 착각하고 나를 내세우고자 하며
나를 느끼고자 하는 마음들입니다. 육근(六根)을 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육근, 즉 안이비설신의로 외부적인 자극을 찾습니다.
눈귀코혀몸뜻은 끊임없이 외부적인 자극을 찾으러 다니며
그러한 자극을 통해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눈으로 무언가 좋은 구경거리를 보러 다니고,
귀로 칭찬과 좋은 말을 듣고자 하며,
혀로 맛있는 음식을 찾아다니고,
좋은 것 몸에 걸치려고 옷을 사고, 화장을 하고 그럽니다.
사람을 만나도 눈으로 보기에 예쁜 사람을 찾으며,
자기 칭찬 많이 해 주고, 자기 떠받들어 주는 이를 좋아하며,
좋은 사람을 보면 안고 싶고 키스하고 싶어 한단 말입니다.
이렇듯 우리의 아상은 끊임없이 외부를 향해 한없이 치닫게 마련입니다.
그것이 육근이 가지고 있는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육근은 외부의 대상, 즉 육경(六境)을 찾아 헤매고 다닙니다.
더 좋은 경계, 더 좋은 자극을 찾아 집착하고 소유코자 합니다.
눈으로 좋은 것을 보면 내 옆에 두고 싶고,
귀로 좋은 말을 들으면 자꾸 생색내고 싶어하며,
좋은 음식은 자꾸 먹고 싶고, 좋은 사람은 자꾸 ‘내 사람’으로 만들려고 애를 씁니다.
이렇게 육근이 시키는 대로 이끌리다보면
자꾸 욕심과 집착이 늘어나 아상만 키우게 됩니다.
외부의 대상인 육경에 대한 업만 자꾸 짓게 되는 것입니다.
수행이란 육근을 잘 조절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자꾸 바깥으로만 치닫으려는 눈 귀 코 혀 몸뜻을 잘 다스리는 일입니다.
아무 생각없이 육근이 시키는대로만 하다보면 육근의 주특기인
욕심과 집착 그리고 업짓기만 늘어갈 뿐입니다.
그래서 아무 생각없이 살아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잘 관찰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육근이 이번엔 어떤 놈에게 이끌리는가’ 하고 말입니다.
육근은 좋은 음식으로 손이 가고,
배가 불러도 꾸역꾸역 맛나는 음식이 있으면 먹어야 하지만,
맑은 수행자라면 음식에 대한 탐심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육근이 시키는대로 하면 탐심(貪心)만 키우는 꼴이 되기 때문입니다.
육근은 칭찬 듣고 싶어 하고, 나 잘난 줄 알고 살지만
수행자는 마땅히 아상만 키우는 칭찬을 경계할 일이며,
나 못난 줄 알고 살아갈 일입니다.
육신이 시키는대로 하면 저 칭찬하지 않고
잘못된 점 지적하면 화를 내는 진심(嗔心)을 키우고,
저 잘난 줄 아는 치심(癡心)만 키우게 됩니다.
육근은 좋은 사람을 만나면
안고 싶고 키스하고 싶고 자고 싶고 ‘내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지만,
수행자는 그 마음을 관하여 몸을 잘 다스릴 일입니다.
육근이 시키는대로 하면 쉽게 쉽게 상대방과의 업을 짓게 됩니다.
이처럼 색성향미촉법 육경이라는 여섯가지 바깥 경계에
자꾸 마음을 빼앗기게 되면 마음을 닦을 수 없게 됩니다.
마음을 닦는다는 것은 육근을 다스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눈으로 좋은 것만 보고,
귀로 좋은 것만 듣고 좋은 냄새,
좋은 맛, 좋은 감촉만 따를 것이 아니라
좋고 나쁨의 양 극단을 모두 놓아버려 일체 모든 경계를
좋고 나쁨 없이 있는 그대로 관하고 받아들일 일입니다.
외부의 경계를 좇지 말고 끄달리지 말며,
좋다고 잡으려 애쓰거나 밉다고 버리려 애쓰지 말고
있는 그대로 분별없이 관하여 육경의 유혹에 육근이 놀아나지 않도록 잘 다스릴 일입니다.
이런 육근에 끄달리는 습(習) 때문에 수행을 한다고 하는 수행자들
또한 육근이 좋아하는 수행만을 찾아다니곤 합니다.
내면을 들여다보고 마음을 닦으려 하기 보다는,
어느 절 부처님이 영험 있다고 하면 마음을 바깥으로 돌려 그 절 찾아가려 하고,
어느 큰스님 하면 그 스님 얼굴 뵙고 싶어 안달이란 말입니다.
어디 어디에 법회가 있다고 하면
귀로 듣는 것을 좋아하여 법문 들으러 다니고,
또 어떤 책이 좋다 하면 책 사러 다니고,
절 하라 해도 얼마간 하다가는 몸뚱이 편하려고 염불한다 하고,
또 염불해라 하면 얼마 후에 입 편하려고 참선한다 하고,
참선하라 해도 몸뚱이 가만 놔두는 것도 못해 또 포기한다는 말입니다.
절 찾아가고, 스님 찾아가고, 법문 듣고, 책 읽는 것이 나쁘다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근본은 거기에 있지 않고 내면을 향하는데 있다는 말입니다.
바깥에 있는 절과 스님을 찾기 보다는
내면을 청정한 도량으로 또 맑은 수행자로 만들어야 하며,
귀로 법문 듣고 눈으로 책 읽는 것만 좋아하기 보다는
내면을 밝게 닦아 내면의 법문, 자성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수행도 그 대상이 자꾸 바깥으로 향한다면,
머리로만 이해하고, 생각으로만 헤아리게 되어
막상 큰 경계에 닥치고 나면 내면의 중심이 흔들리게 마련입니다.
머리를 통해서 알음알이의 즐거움만을 추구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물론 절을 찾고 스님을 찾으며 법문을 듣고 책을 읽음으로써
마음공부에 대한 확신과 가르침에 대한 밝은 이해를 통해 본격적인 내면의 닦음을
실천해 갈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나의 실천을 위한 준비과정이지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인터넷에서 법문을 듣고 수행 칼럼을 읽고
매일 매일 도반들의 수행일기를 읽는다고 그것이 수행 다 한 것은 아닙니다.
내 실천은 하나도 없으면서 남의 것만 엿보고
부처님 말씀만 읽고 이해하고 한다면 나에게 무슨 공덕이 있겠습니까.
남의 다리 긁어 봐야 내가 시원하겠습니까.
그것을 통해 내가 발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스님의 설법, 도반의 이야기를 통해
내가 다시 한번 마음 굳건히 하고 실천하며 닦을 수 있어야 합니다.
백일 천일 글만 읽고 좋구나 느끼기만 한다면
그것은 순간 마음이 편안해지기는 할 지언정 마음이 닦이고 집착과
번뇌가 녹고 하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법문을 들으며, 도반의 수행일기를 읽으며
‘좋구나’ 느끼는 순간 발심을 하고 실천을 해야 합니다.
100일 정진하는 법우의 이야기를 듣고는
나도 따라 발심하여 오늘부터 시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야! 저 법우님 수행 잘 하시네’ 하고 관망만 해서는
내 마음 살림살이가 되지를 못하니 하는 말입니다.
모쪼록 외부의 육경에 끄달리는 마음을 잘 다스려
내면으로 육근을 단속하고, 육경을 닦으려 하지 말고 육근을 닦으려 할 일입니다.
바깥으로 빼앗기는 마음 안으로 잘 조복하여 닦을 일입니다.
시원하게 내 다리 벅벅 긁으라는 말입니다.
중아함경의 말씀입니다.
일심으로 경을 듣는 사람이면 훌륭하지만,
일심으로 경을 듣지 않는 사람은 그보다 못하다.
경을 듣고서 법을 실천하는 사람은 훌륭하지만,
듣고도 법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그보다 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