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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크랩] 가을엔 바람도 하늘빛
    이해인 수녀님의 詩 2011. 12. 17. 15:41




    가을엔 바람도 하늘빛
      글 : 이해인 클라우디아 수녀님 1 끝기도를 끝내고 나의 긴 그림자를 끌고 오는 밤의 숲길에서 나무들이 나를 부르는 침묵의 소리. 짙은 향기를 남기며 사라지는 백합들의 마지막 노랫소리. 나무 층계를 오르다가 문득 올려다 본 하늘의 별. 나는 그만 황홀하여 갈 길을 잃고 말았네. 2 젊은 날 사랑의 뜨거움이 불볕 더위의 여름과 같을까. 여름 속에 가만히 실눈 뜨고 나를 내려다보던 가을이 속삭인다. 불볕처럼 타오르던 사랑도 끝내는 서늘하고 담담한 바람이 되어야 한다고- 눈먼 열정에서 풀려나야 무엇이든 제데로 볼 수 있고. 욕심을 버려야 참으로 맑고 자유로운 사랑을 할수 있다고 - 어서 바람 부는 가을숲으로 들어 가자고 한다. 3 가을엔 바람도 하늘빛이다.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주고 받는 말들도 기도의 말들도 모두 너무 투명해서 두려운 가을빛이다. 들국화와 억새풀이 바람속에 그리움을 풀어헤친 언덕 길에서 우린 모두 말을 아끼며 깊어 지고 싶다. 가을 하늘에 조용히 떠다니는 한조각의 구름이고 싶다. 4 바람부는 소리가 하루 종일 내 마음을 흔들던 날, 코스모스와 국화가 없으면 가을은 얼마나 쓸쓸할까, 이 가을에 나는 누구보다 나 자신을 길들여야지. 아름다운 음악을 듣거나 좋은 책을 읽는 즐거움도 행복한 것이지만 홀로 듣는 음악,홀로 읽는 책을 좋아하는 것 못지않게 함께 일하는 이들의 마음의 소리에 귀기울이며 조화로운 삶을 살 수 있어야겠다. 때로는 나를 힘들게 하고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듯한 사람들의 눈빛과 표정에서 내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실수나 잘못을,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세심하게 읽어낼 수 있는 지혜를 지녀야겠다. 나이 들수록 온유와 겸손이 어렵다는 것을 절감하면서 창밖의 나무들을 바라본다. 5 '나무에선 돌이나 쇠붙이에서 느낄 수 없는 생명감과 정서를 느낀다. 나무향기를 맡고 싶다. 나무 향기를 내는 빗을 갖고 싶다. 나무향기로 남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정목일님의 <나무향기>라는 수필을 읽은날, 나는 뜻밖에도 언니가 보내준 향나무 원목 한 토막을 선물로 받았다. '이건 향나무 조각인데 책상에 두고 상본이나 십자고상 같은 것을 올려 놓으면 어떨까? 시상()이 떠오를지도 모르지'하는 메모와 함께. 그러고 보니 내 방 안에는 향나무 묵주. 향나무 필통, 향나무 연필들로 이미 향기가 가득하다. 6 어린아이가 아프다고 칭얼대는 모습은 밉지 않은데 어른이 되어 자기의 아픔을 이리저리 어떤 모양으로든지 보채는 모습은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아픔은 숨기고 오히려 남을 걱정하는 이들의 순한 모습이 오래 기억에 남고 감동이 되는 것은 우리가 평소에 너무 자기 걱정만 앞세우고 자기 아픔에만 빠져 남을 돌보는 넓고 큰 마음을 잊고 살기 때문이다. 7 '용서하고 선을 베푸는 일을 결코 게을리하지 말라고 가르치시는 주님의 자비하심을 나는 더욱 열심히 따르고 싶다. 나와 천성이 다른 사람을 비판하거나 섣부른 판단을 내리기보다는 그의 좋은 면을 보려고 애쓰는 편이다. 어떤 사람에 대해서건 불신을 품는 일, 특히 보잘것없는 사람들, 가난하고 권력 없는 사람들에게 불신을 품는 일, 남을 깎아내리는 평가 등은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나를 고통스럽게 하며, 마음 깊숙한 곳에서 나를 아프게 한다.' 교황 요한 23세의 이 말씀을 몇 번이나 되풀이해 읽으며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그의 끝없는 애정에 감동했다. 나도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도와주십사 하고 기도했던 오늘. 용서한다고 쉽게 말은 하면서도 실제로는 서로 용서하지 않는 일이 우리 사이엔 얼마나 많은지! 가끔은 하느님도 이 부분을 슬퍼하시라는 생각이 든다. 8 이별은 아직도 쓰라리고 남북은 함께 슬프구나. 여섯 살 때 납북되신 아버지가 낡은 사진 속에서 걸어나와 가끔 내게 말을 건네신다. "얘야, 잘 있니? 너무 오랜 세월 우리는 헤어져 살았구나. 내가 왜 떠나게 되었는지
      나도 모른단다. 이 땅에서 다시 만날 희망이 없어졌지만 나의 사랑은 식지 않았단다. 내 탓이 아니라도 나를 많이 원망하며 그리워했을 모든 가족에게도 안부 전해 주렴." 9 오늘은 주일. 끝내기 위해서 숨이 찼던 일의 의무도, 아름답지만 조금은 고단했던 사랑의 의무도 오늘은 모두 쉬기로 하자. 끊임없는 계획으로 쉴 틈이 없었던 생각도 쉬게 해주자. 급히 따라오는 시간에도 쫓기지 말고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는 여유를 지녀야지. 새소리, 바람소리를 들으며 그냥 조용히 웃어 보는 기쁨 또한 기도임을 믿는다. 「사랑할땐 별이되고」中에서
    수녀님! 사랑합니다.
    출처 : 민들레의 영토
    글쓴이 : 티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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