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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크랩] 박재삼 문학관 (삼천포 노산공원)
    시와 명상의 세계 2009. 10. 5. 22:05

     

     

    박재삼

     

    김소월에게서 발원해 김영랑·서정주로 이어지는 한국 전통 서정시의 맥을 이은 시인이었다.
    박재삼의 유년시절은 시련의 연속이었다. 사천 앞바다의 품팔이꾼 아버지와 생선장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중학교 진학도 못하는 절대궁핍을 경험해야 했다. 어렵게 삼천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수학했고, 1953년 〈문예〉에 시조 〈강가에서〉를 추천받은 후 1955년 〈현대문학〉에 시 〈섭리〉·〈정적〉 등이 추천되어 등단했다. 그의 시는 당시 서정주와 유치환이 서로 반해 추천을 다툴 만큼 출중했다. 시 작품의 탁월함은 무엇보다도 가락에서 두드러졌다. 우리말을 의미·개념에만 맞추어 쓰는 것이 아니라 운율에 맞추어 리드미컬하게 구사하는, 리듬의 중요성을 태생적으로 알아차린 시인이었다. 전통적 가락에 향토적 서정과 서민생활의 고단함을 실은 시세계를 구축했으며, '한을 가장 아름답게 성취한 시인', '슬픔의 연금술사'라는 평가를 받았다. 때로 그의 시들은 '퇴영적인 한에 머물러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절창(絶唱) 〈울음이 타는 가을강〉 등에서 드러나듯 '생활과 직결된 눈물을 재료로 한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 주었다.
    박재삼은 모더니즘·민중주의 등과 같은 경향이 유행처럼 번지던 시대에도 어떤 계파에 몸을 두지 않고 자신의 영역을 지켰다. 그리고 그 안에서 고향 바다의 비린내가 묻어나는 서정과 비극적 사랑,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 등을 노래했다. 슬픔을 아는 시인이었으며 평생을 가난하고 고달프게 살았다. 1955년부터 〈현대문학〉 등에 근무하다 1968년 고혈압으로 쓰러져 반신마비가 된 이후 일정한 직업을 갖지 않았으며 위장병과 당뇨병 등 병치레를 하기도 했다. 시작(詩作)과 함께 약 25년간 요석자(樂石子)라는 필명으로 바둑 관전평을 집필해 생계를 해결했으며 바둑계에선 '박국수'(朴國手)로 불렸다. 처녀시집 〈춘향이 마음〉 이후 〈뜨거운 달〉·〈찬란한 미지수〉·〈햇빛 속에서〉·〈천년의 바람〉·〈비 듣는 가을나무〉·〈해와 달의 궤적〉·〈다시 그리움으로〉에 이르기까지 시집 15권과 수필집 〈차 한잔의 팡세〉를 냈으며, 현대문학상·한국시인협회상·노산문학상·인촌상·한국문학작가상 등을 수상했다.

     

     

     

    *내 사랑은*


    한 빛 황토재 바라 종일 그대 기다리다

    타는 내 얼굴 여울 아래 가라앉는

    가야금 저무는 가락, 그도 떨고 있고나



    몸으로, 사내 장부가 몸으로 우는 밤은

    부연 들기름 불이 지지지 지지지 앓고

    달빛도 사립을 빠진 시름 갈래 만 갈래



    여울 바닥에는 잠 안자는 조약돌을

    날새면 하나 건져 햇볕에 비춰주리라

    가다간 볼에도 대어 눈물 적셔주리라



    詩/박재삼






    소년처럼 수줍게 웃던
    해맑은 그를
    안다.
    시조를 통한
    소박한 만남이였다.

    참 예술인의 고통 이전...
    그는 너무 괴로운 육신이였다.
    아무것도 마시거나 먹지 못하면서...

    그는 삐걱이는 낡은

    나무계단을 오르는

    2층 기원에서

    생을 살라먹는 중이었다.

     

    병마 속에서도
    생명을 지탱하는 것은
    맑은 곡주뿐...

     

    단 한 병의 淸河
    그 맑은 알콜 몇 방울이
    그를 몇 년 더 지탱하게 했을까?

    물보다 더 맑은 알콜은
    늘 그와 타협 할 수 있었다.
    멸치 서너마리와 함께...
    멸치처럼 말라가는 그를 보았다.

     
    그는 가고 없지만


    그의 글에서는
    언제나 비 온 뒤 산 골짜기 골짜기 마다에서

    스멀스멀 피어 오르는 구름이 될 물안개 같은

    그의 살아 움직이는 서정의 魂을 만나 볼 수 있어서 참 좋다.


    글/이 요조
    2001년 글에서~~   http://blog.daum.net/yojo-lady/54299

     

    문학관을 건립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선생님 가시고 9년이 되어갈 이제사 찾아 뵌 셈이다.

     

    삼천포가 사천과 합해지고 지금은 사천으로 불리우지만...

    사천은 비행장으로 먼저 기억해설까? 

    왠지 은빛 뱅기 날개의 금속성 쇳소리가 나는 듯하고

    삼천포라는 옛 이름은 엄마의 살냄새가 묻어있는 베잠뱅이처럼 그렇게 정겹다.

    뒤안길로 사라져가는 이름!

    삼천포!

    이 얼마나 정겨운 포구의 이름이던가!

     

     선생님은 자랑하셨다.

    바로 이 글씨체가 씌인 명함을 내보이시며 인쇄업을 하는 아들이 만들어 준 거라시며

    명함에 적힌 이 이름 글자체를 무척 사랑해서 자랑하셨다.

     

    일제감점기 때 다 불살라버린 향교

    이제 삼천포에도 호연재가 다시 지어지고 호연지기가 살아났다고들 한다.

    삼천포가 길러낸 문인 박재삼!

    노산문학상을 받으신 노산공원 이 곳에 살아생전 시비를 건립하다.

     선생님의 브로마이드 앞에서 깜짝 놀라다!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게 설치)

     방명록을 쓰고

     천천히 일이층을 관람하면 된다.

     

     

     평소 소장하신 책과 생활집기들을 전시한 곳! 안경,만년필 등....

     

     

     

     

     

     詩碑는 삼천포 대교가 바라보이는 바다를 향해 건립되었다.

     

     제게 주신 선생님의 친필,

    시비제막식에 양주분이 참석한 사진이 책 안표지에 프로필로 대신

     

    삼천포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노산공원

    그 공원에서 바라본 바다!!

     

     

     

     

     삼천포 화력발전소가 보이고...

     빨간 등대도 보인다.

    선생님의 詩 어딘가에 냇가에 발 담근 여인의 빨간 칠한 발톱 색깔같아 보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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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나비야 청산가자
    글쓴이 : 이요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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