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탑봉 아래 어풍대에서 건너다 본 청량사. 청량산 산행은 꽃술자리에 위치한 청량사를 꽃잎처럼 감싼 봉우리, 봉우리들을 걷는 길이다. |
▲ 김생굴. 신라 명필 김생이 글씨를 연마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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讀書人說遊山似 사람들은 글읽기가 산을 유람하는 것과 같다더니
今見遊山似讀書 이제 보니 산을 유람하는 것이 책 읽는 것과 같구나
工力盡時元自下 공력을 다하면 스스로 내려오는 법
淺深得處摠由渠 얕고 깊음을 아는 것 모두가 자기에게 달려있네
坐看雲起因知妙 조용히 앉아 일어나는 구름을 보고 오묘함을 알고
行到源頭始覺初 발길이 근원에 이르러 비로소 시초를 깨닫네
- 퇴계 이황, ‘책을 읽는 것은 산에서 노니는 것과 같다(讀書如遊山)’에서
#1. 논어에는 ‘인자요산 지자요수(仁者樂山 智者樂水)’란 말이 나오지만, 유학자와 산이 그리 친한 것 같진 않다. 산세를 빗대 지은 이름을 제외한 국내 유명산의 봉우리 이름이 비로봉, 문수봉, 의상봉, 천황봉, 선인봉 따위로 대부분 불교나 선도와 관련된 것만 봐도 그렇다. 그러나 경북 봉화와 안동의 경계에 위치한 청량산은 예외다.
청량산이란 이름은 청량사에서 따 왔다지만, 장인봉, 자란봉, 자소봉, 탁필봉, 연적봉, 경일봉, 탁립봉, 축융봉 등 12봉우리(6·6봉) 이름에는 조선조 유림의 냄새가 물씬 난다. 아닌 게 아니라 이 봉우리 이름은 조선 중기 유학자였던 주세붕이 중국 산의 이름을 본뜨는 등의 방법으로 지었다.
이름뿐 아니다. 한때 30여개의 당우가 있었다는 청량산의 가장 요지는 청량사가 차지하고 있지만 이 산에서 조선조 명유였던 퇴계 이황의 자취는 압도적이다. 퇴계는 주세붕의 ‘청량산록’에 쓴 발문에서 “비록 지경은 다른 고을이지만, 이 산은 실지로 내 집안의 산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부형을 따라 봇짐을 메고 이 산에 왕래하면서 독서하였던 것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라고 썼거니와 실제로 청량산은 진성 이씨의 3대 인재인 송재 이우(퇴계의 삼촌)와 온계 이해(퇴계의 친형), 퇴계 이황이 모두 공부를 해서 과거에 급제한 곳이다.
특히 퇴계가 나중에 고향에서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들을 가르칠 때도 청량산은 늘 마음의 휴식처이자 수도장이었다. 퇴계는 또한 도산에서 이곳 청량산에 이르는 낙동강의 길목을 따라 9군데의 명소를 도산구곡으로 명명하고 각각에 대해 시를 남기기도 했다. 훗날 퇴계의 도산서원으로 몰려들던 퇴계의 후학들이 성지순례하듯 청량산을 유람하고 다투어‘유산기(遊山記)’를 남긴 것도 청량산에 남은 퇴계의 흔적 때문이다.
그렇다고 청량산에 퇴계만 머물렀던 것은 아니다. 신라 명필 김생이 글씨를 공부했다는 김생굴이 있고, 명문장가 최치원과 고려조 최고의 시인 백운 이규보가 머물렀다는 전설도 전해온다. 청량사 유리보전(琉璃寶殿)의 현판은 고려조 공민왕의 글씨다. 홍건적의 난을 피해 청량산성으로 피란온 인연으로 글씨를 쓴 것으로 전해온다.
#2. 중앙고속도로가 생기기 전까지만 해도 경북 봉화나 영양만한 오지도 흔하지 않았다. 경부·영동고속도로와 5번, 36번 국도를 갈아타며 원주, 치악산 고개, 단양, 죽령, 풍기를 거쳐 봉화까지 가는 길은 큰 고개를 2개나 넘고 강을 건너며, 먼지나는 시멘트 공장 앞을 지나야 하는 먼길이었다. 특히 봉화군 소천면이나 춘양면, 재산면, 명호면에서 서울까지 오는 데는 하루해가 걸렸다.
소천면 현동리에서 아침 9시쯤 서울행 버스를 타면 오후 6시가 지나서야 서울에 도착했던 게 15년쯤 전이던가. 이즈음 봉화군 영양군 일월면·청기면에서 조지훈 시인의 고향 마을(주실)을 둘러본 뒤 봉화군 재산면을 거쳐 청량산 고개를 넘으며 만난 재 아래 산골 마을. 나 또한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산골 마을 출신이지만 뭐 이런 오지가 있나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중부고속도로, 영동고속도로, 중앙고속도로를 갈아타며 서울 도심부에서 영주까지 오는 데 2시간30분쯤. 여기서 다시 새롭게 단장된 36번 국도와 918번 지방도, 35번 국도를 번갈아 타며 청량산까지 가는 데 1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하룻밤 묵지 않으면 불가능하던 청량산이 하루에 다녀올 수 있는 산으로 바뀐 것이다. 아침 7시에 서울을 출발하면 산행시간을 5, 6시간 정도 잡아도 밤 9시쯤이면 충분히 서울로 올 수 있다.
물론 이런 속도와 편리에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충주호와 남한강은 제대로 볼 틈도 없이 휙 지나치고 전설따라 굽이굽이 넘던 죽령은 3분여 만에 달려버리는 터널로 바뀌었다. ‘금계포란형’ 명당으로 유명한 36번 국도변의 봉화 닭실마을도 새 도로는 멀찌감치 비켜간다. 그나마 변하지 않아 보이는 것은 도산서원에서 낙동강 상류를 타고 태백으로 올라가는 35번 국도의 아름다움뿐. 아직도 이 지역에 처음 가는 이들은 대부분 낙동강과 청량산의 절벽, 산골 오지가 주는 아름다움에 취해 자동차를 느리게 운전한다.
#3. 산행 기점은 크게 세 곳이다. 하나는 아래쪽 청량폭포에서 장인봉 쪽으로 가는 길, 또 하나는 선학정에서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청량사로 오르는 길, 또 다른 하나는 맨 위쪽 입석에서 응진전이나 경일봉 쪽으로 가는 길이다. 흔히 그렇듯이 입석에서 산행을 시작했다. 이 코스의 가장 큰 장점은 조금만 다리품을 팔아도,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하는 빼어난 절경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입석에서 10분도 채 못돼 절벽 난간에 기댄 응진전을 만날 수 있다. 처음 온 등산객들은 하나같이 “설악산에서는 3시간이나 올라야 볼 수 있는 절경”이라며 입을 다물지 못한다. 실제로 규모야 설악산에 비할 바 아니지만, 오밀조밀한 청량산의 아름다움은 설악산 못지않다.
금탑봉 벼랑 사이로 난 길을 따라가며 절경은 이어진다. 응진전을 지나면 금세 어풍대, 전체적으로 연꽃을 닮은 청량산의 꽃술 자리에 있다는 청량사가 한눈에 들어온다. 깎아지른 바위 아래 경사진 면에 축대를 쌓아 공간을 만들고, 당우를 들어앉히거나 마당을 만들어놓은 매우 아름다운 절이다. 풍수 문외한의 눈에도 절이 들어선 자리는 참으로 절묘하다.
청량사가 가장 잘 보이는 어풍대를 전후해 신라 문장가 최치원이 거주했다는 암자터와 신라 명필 김생이 글씨를 연마했다는 김생굴이 나온다. 최치원이야 실제 이곳에 머물렀는지 알 수 없지만, 봉화군 재산면 출신인 김생이 여기 머물렀을 개연성은 상당하다.
청량산의 본격 산행은 김생굴을 돌아본 뒤 금탑봉, 경일봉을 오르며 시작된다. 경일봉을 오르는 길은 가파른 흙길, 천천히 걸어 배낭을 멘 등에 땀이 밸 즈음 눈앞이 트인다. 여기서부터는 자소봉, 탁필봉, 연적봉을 거쳐 청량산의 정상인 장인봉에 이르는 길은 된비알 오르내림과 철계단의 연속이다. 그만큼 다리가 아프다. 하지만 더러 한눈에 들어오는 청량사와 선학봉, 자란봉, 향로봉, 연화봉, 축융봉 등의 절경이 아픈 다리쯤 아무것도 아니게 만든다. 동쪽으로 일월산이 아스라하고, 북쪽을 길게 막고선 백두대간 산군들이 장엄하다.
그렇게 오르내리며 능선을 걷다보면 어느새 장인봉. 봉우리에서 조금 떨어진 전망대에 이르면 청량산 절벽 아래로 낙동강이 굽이쳐 흐른다. 청량산 산행의 절정 중 하나다. 내려올 땐 청량사 쪽으로 오는 것이 좋다. 주지 지현 스님이 20년간 일군 청량사며, 퇴계의 후학이 만든 청량정사, 그리고 청량정사 옆 산꾼의 집 차맛이 멀리서 보고 지나쳐 버리기에는 너무 아깝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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