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규 재판:
육군계엄보통군법회의에서 박정희 대통령 시해산건을 공판하고 있다. “빠앙∼ 갑자기 총성이 들렸지요.
총성이 들리기 전에 언성을 높여 싸웠다구요? 그런 건 다 거짓말예요. 그분앞에서 김씨하고 차씨가 투닥거리는 그런 장면은 감히
생각치 못할 일이죠. 사전 알력은 있었겠지만, 총성은 그냥 갑자기 난 것이었어요. 차지철 의 오른쪽 손목에 구멍이 뻥 뚫렸어요.
난 손목에 그렇게 구멍이 뻥 뚫린 건 처음 봤어요. 순간 차지철은 화장실로 도망갔어요. 총이 없어서도 그러했겠지만
아마도 다음 총알이 각하에게 날아 가리라는 것은 상상도 못했겠죠. 하여튼 경호를 맡은 사람의 행 동은
아니었어요.
저는 그 순간 이런 장면을 각하는 어떻게 생각하실까? 바로 옆을 쳐다봤지요. 각하는 총소리에도 조금의 동요도
없이 눈을 지긋 이 감고 앉아계셨어요. 이 녀석들이 또 철없이 난동을 부리는구 나 하는 식의 태연한 모습이었어요. 이때 운명의
총알이 튀었지요. 오른쪽 가슴으로부터 비스듬히 복부를 관통해서 왼쪽 아래 옆구리로 피가 줄줄 흘러내렸습니다. 그런데도
박대통령은 아무런 흐트러짐이 없는 그 자세로 그대로 위엄을 지키며 끝까지 앉아계 셨습니다.”
지금 생각만 해도 어제 일처럼
몸서리쳐지고 가슴이 메어진다는 그녀는 담담하게 그때 그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목소리는 변함없 이 옛정취를 전해주건만 그녀의
얼굴에는 기나긴 고뇌의 연륜이 쌓여있었다. 그것은 가냘픈 한 여인의 한이라기보다는 우리 최근 세사의 굴곡진 이랑들이었다. 나는
아무 이유없이 그냥 심수봉의 노래를 좋아한다. 그녀의 가락의 굽이마다 이는 화사한 산들바 람을, 갑사와 다이아몬드로 휘감은
페르시아공주의 하느적거리는 율동보다 더 매혹적인 선율을 나는 사랑하는 것이다. 그래서 14 일 저녁 동대문 남녘 서울 옛 성터가
남아있는 곳에서 그녀를 만 났다.
―병풍 뒤에서 노래를 부르게 했다는 게 사실이오? “그런 엉터리 얘기가 어딨어요?
아무리 권력사회라지만 그런 식 으로 사람을 대접하지는 않았어요. 내가 아무리 얼굴이 못생겼다 지만….”
그누구가
심수봉이 못생겼다 말했던가? 그녀는 아직도 젊고 신선 했고 고일(高逸)한 품격을 지니고 있었다. 꾸밈없이 아름다운 자
태였다.
새벽부터 시내로 나온 시민들이
박정희 대통령의 유고 소식이 담긴 호외를 읽고 있다. 밀실의 참극'서
榮華의 덧없음 배워 “제가 박대통령 왼편에 기타들고 앉아있었고, 오른편엔 신재순, 코너엔 차지철이 앉아있었지요.
그 맞은편엔 김계원, 김재규가 앉아있었죠. 대통령께서 저에게 ‘심양, 그때 그 사람 한번 불러 보게’하고 청했어요. 그
노래를 부르고 나니깐 다른 노래 하나 더 하라고 해서 재순이가 ‘사랑해 당신을’ 불렀어요. 그런데 걔는 음치였어요. 너무
못부르니까 박대통령께서 재순이 노래부 르는 것을 도와주시느라고 흥얼거리셨죠. 그리고 제가 기타반주 를 해드렸구요. 그때
빠앙∼ 총소리가 난 거예요.”
역사를 한번 되돌아보자! 이것은 지금으로부터 꼭 24년전 청와 대권력 주변의 밀실정치의
모습이다. 그런데 지금은 노대통령 자신이 깨끗한 정치를 해보겠다고 대통령직을 내걸고 대국민호소를 하고 있다. 우리역사의
상전벽해(桑田碧海)의 이 변화를 우리 자신이 너무 폄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곤 곧이어 화장실에서 나온 차지철과
김재규 사이에서 격 투가 벌어졌죠. 그리곤 불이 꺼졌고 김재규가 나갔어요. 그리곤 잠시 정적의 순간이 계속되었죠. 이땐
이미 박대통령은 쓰러져 있었어요. 그때 정적 속에서 심하게 가래가 끓는 소리가 들렸어 요. 나는 본능적으로 대통령을 부축하면서
‘괜찮으세요’하고 물었지요. 그때 ‘괜찮아’하는 소리가 들렸어요. 대통령 뒷켠으로 시커먼 방석 같은 게 있었어요. 그때
그것을 짚었는데 물컹, 끔 찍한 느낌이 들었어요. 피가 시커먼 묵이 되어있었던 거예요.
나는 도망치고도 싶었지만 어찌할 수
없이 대통령을 부둥켜안고 있었죠. 그때 김재규가 다시 들어와서 대통령머리에 총을 대고 확인사살을 하는 것이었어요.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부들부들 떨며 애원하는 눈빛으로 김재규를 바라봤지요. 그런데 찰칵∼ 불 발이었죠. 나는 그때 이젠 살았구나 했어요.
그런데 김재규가 나가자마자 누가 총을 건네 주었어요. 김재규는 새 총을 들고 들어 와 가혹하게 대통령 머리에 겨누었지요.
박대통령은 제 품에서 그렇게 마지막 숨을 거두셨지요. 그 이후로는 제 정신이 아니었 고 제대로 생각이 나질
않아요.”
10.26사태로 계엄령이 선포.
중앙청앞에서 탱크를 타고 무장한 군인의 살벌한 모습. 다시 상기할 필요조차 없는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1979년 10월 26일 밤, 그 때 그 사람! 主와 客이 하나된 '나'를 찾아 유랑! ―그대의 인생에서 10·26은 큰
사건이었죠? “물론이지요. 제 인생의 모든 것을 뒤흔든 너무도 큰 사건이었 지요.” ―그럼 그 사건으로부터 무엇을 배웠습니까?
“인생의 영화가 너무 허망한 것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배웠습니다. 저는 정치가남편을 얻는 것이 어려서부터의 꿈이었어요. 그
꿈이 산산조각 났고 권력이 보잘것없다는 것을 체득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부른 ‘무궁화’에 이런 가사를 집어넣었지요. ‘날지 도
못하는 새야. 무엇을 보았니. 인생의 영화가 덧없다. 머물지 말고 날아라! ’ 결국 제 신세를 노래한 것이죠.” ―그 사건이
1979년 10월, 심수봉 아니 심민경(沈玟卿)이 MBC대 학가요제에서 ‘그때 그 사람’으로 세인의 주목을 끈 것은 1978 년,
그렇다면 궁정동 그 사건 당시도 대학생이셨겠네요?
“그렇습니다. 명지대학교 경영학과 4학년이었습니다. 대학가요 제에서
수상은 못했지만 지구레코드사에서 저의 재능을 알아봤고 79년 1월에 제 판을 냈습니다. 그것이 5월에는 이미 공전의 힛 트를
쳤고, 궁정동사건으로 제 인생에 암운이 드리우기까지 6개 월간 세 방송사에서 경쟁적으로 저를 출연시켰고, 화려한 데뷔인 생을
살았습니다. 가수로서의 제 공적인 인생은 이 6개월이 전부라 말할 수 있죠. 그 후로 8년 동안 저는 일체 활동을 할 수 없었
습니다.”
―왜요? “전두환씨가 날 아주 싫어했어요. 내가 박대통령을 국민에게 연 상시킨다고 공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적극 막은 것이죠. ‘조국을 위해 목숨을 버리고 하늘에 산화한 넋이여! 몸은 비록 묻혔으 나 나라를 위해 눈을 못감고 무궁화꽃으로
피었네.’ 이런 가사 의 ‘무궁화’노래가 돌아다니자, 전두환씨가 직접 왜 이따위 노래가 돌아다니냐구 지목해서 금지시켰다고
들었어요. 무궁화는 피면서 지고, 지면서 피고 그래요. 끈질긴 생명력이 있지요. 이 땅 에서 죽어간 피끓는 젊은 넋들을
위로하고 싶었는데… 노래 못하 는 저의 청춘은 죽음이나 마찬가지였죠.”
- - - - 이하 생략
# 대화 상대자-
도올
[ 출처 : 글-문화일보 "당신은 꿈을 너무 많이 꾸는군요" (2003.10.16) 중에서
] 사진-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http://www.kdemocracy.o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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