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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크랩] 여배우 김삼화... 박정희가 짓밟은 신혼부부의 꿈
    멋지고 귀한자료 2018. 2. 3. 06:56

     

     

    여배우 김삼화... 박정희가 짓밟은 신혼부부의 꿈....

    재미 언론인이 밝힌 김삼화라는 여인의 비극적인 인생입니다.

     

    우리나라 역사상, 저렇게 까지 한 왕이 있었을까요?

     

    내막을 봅시다...

     

     

     

     

     

    박정희의 승은 입은 2백 여명의 여인들> 

     

     

    1960년대 후반까지 영화 두 편에 주연 여배우로 출연,

    한국 영화의 톱스타로서 앞날이 촉망되던 

    미모의 영화배우 (서울대 미대출신) 김삼화는

     

    당시 결혼 1년 만에 첫아들까지 얻는 등 행복한 신혼생활로

    동료 선후배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

     

    호사다마' 라 했던가? 

     

    어느 날 난데없이 청와대의 채홍사가 집에 나타난다.,

     

    "각하께서 모셔오라는 명령이십니다, 잠간 청와대에다녀오셔야 겠습니다,

    순간 눈앞이 캄캄했다"

     

    워낙 박정희 대통령의 부름에 응했던 연예인들이 많았던 시절이라

     '내게도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체념과 함께

    사랑하는 남편과 갓난 아들의 얼굴이 눈앞에 스쳤다, 

     

    그러면서 "이제 갓난애의 엄마로서 신혼 유부녀입니다,

    홀로 있는 연예인들이 많은데 저는 좀 빼 줄 수 없을까요?"

    하고 애원했다,

     

    당시 많은 연예인들이 각하의 부르심을 영광스럽게 받아들였던 것과는 달리

    이 여인은

    각하의 부름은 상상도 못 했던 충격 바로 그것이었다,

     

    "잠간 다녀온다는데 웬 말이 그렇게 많아요?"하고 위압적인 자세로 취한

    채홍사 (採紅使)의 자세를 보고

    더 반항하다가는 자신도 또 영화제작 스탭인 남편도

    당장 영화계에서 매장될 것을

    느낀 여인은 순순히 따라나설 수 밖에 없었다,

     

    안내된 곳은 청와대가 아닌 그 옆의 다른 장소 (후에 알고 보니 궁정동 안가) 로

    그 다음 날 새벽까지 각하의 성노예가 될 수 밖에 없었다,

     

    눈이 퉁퉁 부어 집에 돌아오니 남편은 뜬 눈으로 밤을 샌 듯,

    샐쭐해진 얼굴에 눈물이 글썽,

    역시 울고 있는 부인의 설명을 듣고

    부드럽게 위로해 줬다,

     

    "옆집에서 검은 차가 당신을 태우고 갔다기에

    다른 연예인들 처럼 우리에게도 차례가 온 것을 알았다"며

    부인을 부둥켜안고 한 없이 울었다,

     

    그런데 1회용으로 끝나던 다른 연예인들과는 달리

    이 여인에게는 1주일에 한 번씩 채홍사가 찾아왔다,

     

    한 달이 지났다, 그간 체념속에서 살아온 남편은 이날따라 울상을 하면서 "

    여보,놀라지 마, 나 오늘 무시무시한 곳에 끌려갔다 왔어,

    최단 시일 내에 당신과 헤어져야 두 사람 심신이 편할 거라는 협박이야,

    아무래도 우리 갈라서야 하나봐,어쩌지!"하며 울먹였다,

     

    부부는 밤새도록 뿌리칠 수 벗는 운명을 원망하며 울고 또 울었다,

    둘이 모두 사는 길은 빠른 시일 내에 이별하고

    서로의 행복을 빌어주는 길 밖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결론 밖에는 다른 길이 안 보였다,

     

    그리고서는 어찌된 영문인지 남편은 바로 그 뒷날부터 자취를 감추었고

    방안에서는 남편이 쓴 쪽지 한 장이 발견됐다,

     

    "여보, 나를 데리러 온 사람이 밖에 기다리고 있어, 따라가야 해,

    날 찾지 마, 그게 당신도 나도 사는 방법이야

    우리 아이를 잘 길러 줘, 먼 훗날 다시 만나, 사랑해 여보," 이게 마지막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각하는 한 밤 중에 여인과 몸을 섞고 나더니

    내가 부자 미국인을 소개할테니 당장 결혼해

    미국으로 가 살라고 명령했다,

     

    여인은 무슨 후환이 있을지 두려워

    고개를 끄덕였지만 내심은 각하의 속밖에서 해방된다는 희망 속에 기쁨도 자리했다,

     

    신랑은 뜻밖에도 60이 넘은 미국계 할아버지로

    신부될 여인의 아름다움에 마냥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노인은 결혼 후 6년 만에 많은 재산과 두 아들을 남기고 저 세상으로 갔다,

     

    40여 년 전에 이토록 기구한 운명을 지녔던 할머니 (현재 75) 가

    순간이나마 행복했던 신혼 시절을 회상하며

    미국 하늘 아래 전 남편의 아들, 미국인 남편의 두 아들 등 세 아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후 전 남편과는 자신이 재혼한 탓도 있어서 완전히 소식이 두절 되었다고 한다,

     

    최근 유네스코 (UNESCO =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가

    전 세계 독재자들의

    '인권유린보고문'을 발행했다는 소식이다,

    그 중에는 김정일이 미인을 납치 후 자기의 종신 첩으로 썼던 사건도 포함돼 있다,

     

    필자(김현철 칼럼리스트)가 궁금한 것은 박

    정희가 1회용품 내재 소모품으로 쓰던 2백 여 명의 여성

    (김재규 변호인 이동일 변호사가 확인한

    채홍사(採紅使) 한 명의 수첩에 기록된 것만 2백 여 명임) 에 관련된 내용은

    왜 포함돼 있지 않느냐?

     

    이 점에서는 단연 박씨의 악행이 김정일의 추종을 불허했으니 말이다,

     

    박정희가 부하 김재규에게 사살 당했던 해,

    그와 청와대에 같이 살았던 장녀 박근혜의 나이는 27세였다,

     

    박근혜 역시 아버지처럼 2백 여 명의 피해자들이 한낱 소모품 정도록 보였겠지?

     

    왜냐면 40 여 년의 흐른 오늘날까지 그 여자들을 한 분이라도 찾아가

    아버지 대신 사죄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역대 어느 임금도 유부녀를 자기 노리개로 빼앗은 경우는 드물다,

    천인이 공노할 일이기 때문이다,

     

    어느 임금보다도 잔인했던 독재자의 딸이 어찌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것인가?

     

    박근혜는 김대중이 정권 잡자,

    김대중에게는 사과 했지만,

    김삼화 처럼 강간 피해자에게는 사과한 적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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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삼화씨가 출연한 양산도, 논개, 대심청전 영화 포스터
    ? 한국영상 자료원 http://library.koreafilm.or.kr/totalSearch.asp


    특기인 무용을 선보인 <논개>, 한홍합작 영화 <이국정원>, 궁중여인으로 분해 엄앵란과 칼싸움 활극을 선보인 <대도전> 등 15편 안팎의 작품에 출연했다.

    영화 데뷔 이후에도 김삼화무용연구소를 운영했고, 드라마센터의 <한강은 흐른다>로 1962년 연극 무대에 서기도 했다. 지적인 배경과 거침없는 언사로 “영화가의 독설가”로 불리기도 했다.

    박정희에 의해 강제로 미국으로 쫓겨난 김씨는 박정희의 상습적인 성폭력의 두려움으로 평생 노이로제로 인해 괴로워하다 세상을 떠났다고 알려졌다.

     


    이날 국회에서 열린 ‘표현의 자유와 언론탄압 공동대책위원회’에서는 저항시인이자 독립투사였던 ‘모란이 피기까지‘ 서정시인으로 유명한 김영랑 시인의 3남인 칼럼리스트 김현철씨와 인터넷 영상으로 연결하여 사실관계를 확인하였다.

    김현철 씨는 김삼화씨의 실명을 거론하지 않았으나 김씨를 취재하게 된 경위와 취재 상황 그리고 박정희의 김씨에 대한 권력형 성폭력에 대한 증언을 하였다

     

     

     

     

     

     

     

     

     

     

    김현철 씨의 취재 수첩

     

     


    김현철 씨의 국회 발표회 영상 증언

     

     

     

     

    ▲ 미국 한겨레저널 김현철 칼럼 리스트    

    약 력
    성 명 ; 김 현 철 (독립운동가, 김영랑 시인 3남)
    생 년 월 일 ; 1935년 9월 25일

    1965년 ~ 1972년 MBC 서울본사 기자
    1974년 미국 플로리다로 이주
    1974년 ~1990년 한인신문 우리소식 창간 발행인 겸 편집인 한국일보 시카고주재기자,
    동아일보 마이아미지국장,
    중앙일보 마이아미지국장,
    한겨레 마이아미지국장.
    미주한인신문 한국신보 플로리다 지사장,
    미주한인신문 자유신문 플로리다 지사장,
    1991년~2000년 미주한인신문 한겨레저널 창간 발행인 겸 편집인
    2001 ~ 현재 칼럼니스트 (자유기고가)

     


    또 피해사례 발표 후 박정규씨는 "박근혜 대통령이 후보시절 국민들에게 성범죄자는 전자팔찌와 사형제로 강력히 처벌하겠다고 엄벌의지를 밝혔지만 먼저 국민들에게 박정희의 권력형 상습 성폭력에 대한 사실을 밝혀야 하며 잘못된 권력형 성범죄 행위에 대하여는 국가가 유가족들에게 사죄와 배상을 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래는 문제가 된 김현철 칼럼리스트의 글이다.


    <박정희의 승은 입은 2백여 여인들>

    미 한겨레 저널 김현철 칼럼 리스트

    1960년대 후반까지 영화 두 편에 주연 여배우로 출연, 한국 영화의 톱스타로서 앞날이 촉망되던 미모의 영화배우(서울 명문대 출신)가 당시 결혼 1년 만에 첫아들까지 얻는 등 행복한 신혼생활로 동료 선후배 배우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 호사다마’라 했던가? 운명의 여신은 이 여인의 행복에 샘이 났던지 행복한 이 가정에 살살 바람을 불어 넣었다.

    어느 날 난데없이 청와대의 채홍사(採紅使, 연산군 때 전국의 창기 중 미인을 뽑아 왕에게 바치던 벼슬아치) 한 분이 집에 나타난 것이다. “각하께서 모셔오라는 명령이십니다. 잠간 청와대에 다녀오시게 화장하시고 15분 이내로 떠나실 준비를 하세요“하는 게 아니가!

    순간 눈앞이 캄캄했다. 워낙 박정희대통령의 부름에 응했던 연예인들이 많았던 시절이라 ‘내게도 올 것이 왔구나!’하는 체념과 함께 사랑하는 남편과 갓난 아들의 얼굴이 눈앞에 스쳤다. 그러면서 “이제 갓난애의 엄마로서 신혼 유부녀입니다. 홀로 있는 연예인들이 많은데 저는 좀 빼 줄 수 없을까요?”하고 애원했다.

    당시 많은 연예인들이 각하의 부르심을 영광스럽게 받아들였던 것과는 달리 이 여인은 현 남편과 만날 때 까지 연애 한 번 못 해 본 순진한 여성이었으니 각하의 부름은 상상도 못 했던 충격 바로 그것이었다. 허나 각하가 어떤 사람이라고 그런 말이 통했겠는가.

    “잠간 다녀온다는데 웬 말이 그렇게 많아요?”하고 위압적인 자세를 취한 채홍사의 자세를 보고 더 반항했다가는 자신도 또 영화제작 스탭인 남편도 당장 영화계에서 매장될 것을 안 여인은 순순히 따라나설 밖에 없었다.

    안내된 곳은 청와대가 아닌 그 옆의 다른 장소(후에 알고보니 궁정동 안가)로 그 다음 날 새벽까지 각하의 ‘성노예‘가 될 수 밖에 없었다.

    눈이 퉁퉁 부어 집에 돌아오니 남편은 뜬 눈으로 밤을 샌 듯 샐쭉해진 얼굴에 눈물이 글썽, 역시 울고 있는 부인의 설명을 듣고 부드럽게 위로해 줬다. “옆집에서 검은 차가 당신을 태우고 갔다기에 다른 연예인들처럼 우리에게도 차례가 온 것을 알았다”며 부인을 부둥켜안고 한 없이 울었다.

    그런데 1회용으로 끝나던 다른 연예인들과는 달리 이 여인에게는 1주에 한 번씩 계속 채홍사가 찾아 왔다.

    한 달이 지났다. 그간 체념 속에서 살아 온 남편은 이날따라 울상을 하면서 “여보, 놀라지 마, 나 오늘 무시무시한 곳에 끌려갔다 왔어, 최단 시일 내에 당신과 헤어져야 두 사람 모두 심신이 편할 거라는 협박이야, 아무래도 우리 갈라서야 하나봐. 어쩌지? ”하며 울먹였다.

    부부는 밤새도록 뿌리칠 수 없는 운명을 원망하며 울고 또 울었다. 둘이 모두 사는 길은 빠른 시일 내에 이혼하고 서로의 행복을 빌어주는 길 밖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결론 밖에는 다른 길이 안 보였다.

    그러고서는 어찌된 영문인지 남편은 바로 그 뒷날부터 자취를 감추었고 방안에서는 남편이 쓴 쪽지 한 장이 발견됐다. “여보, 나를 데리러 온 사람이 밖에 기다리고 있어, 따라가야 해. 날 찾지 마. 그게 당신도 사는 길이야. 우리 아이를 잘 길러 줘. 먼 훗날 다시 만나, 사랑해 여보. ” 이게 마지막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각하는 한 밤 중에 여인과 몸을 섞고 나더니 내가 부자 미국인을 소개할테니 당장 결혼해서 미국으로 가 살라고 명령했다.

    여인은 무슨 후환이 있을지 두려워 목을 앞뒤로 흔들었지만 내심은 각하의 속박에서 해방된다는 희망 섞인 기쁨도 자리했다.

    신랑은 뜻밖에도 60이 넘은 미국계 할아버지로 신부될 여인의 아름다움에 마냥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 노인은 결혼 후 6년 만에 많은 재산과 두 아들을 남기고 저 세상으로 갔다.

    40여 년 전에 이토록 기구한 운명을 지녔던 할머니(현재 75)가 순간이나마 행복했던 신혼시절을 회상하며 현재 미국 하늘 아래 전 남편의 아들, 미국인 남편의 두 아들 등 세 아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 후 전 남편과는 자신이 재혼한 탓도 있어서 완전히 소식이 두절 되었다고 한다.

    최근 유네스코(UNESCO=국제연합교유과학문화기구)가 전 세계 독재자들의 ‘인권유린보고문’을 발행했다는 소식이다.

    그 중에는 김정일이 미인을 납치 후 자기 종신 첩으로 썼던 사건도 포함돼 있단다.

    필자가 궁금한 것은 박정희가 일회용품 내지 소모품으로 쓰던 2백여 명의 여성(김재규 변호인 이동일 변호사가 확인한 채홍사 한 명의 수첩에 기록된 것만 2백여 명임)에 관련된 내용은 왜 포함돼 있지 않느냐는 것, 이 점에서는 단연 박씨의 악행이 김정일의 추종을 불허했으니 말이다.

    박정희가 부하 김재규에게 사살 당하던 해, 그와 청와대에 같이 살았던 장녀 박근혜의 나이는 27세였다. 철이 난 후 아버지의 몹쓸 짓이 계속되었음을 말한다.

    박근혜 역시 아버지처럼 2백여 피해자들이 한낱 소모품 정도로 보였겠지? 왜냐면 40 여년이 흐른 오늘날까지 그 여자들을 한 분이라도 찾아가 아버지 대신 사죄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는 직접 가서 아버지의 잘 못을 사과한 것을 보면, 박근혜가 사과할 줄 몰라서가 아니라, 박정희에게 불려갔던 모든 여성들이 영광스러워 기뻐하는 중이라고 착각하고 있지나 않은지?

    우리나라의 역대 어느 임금도 유부녀를 자기 노리개로 빼앗은 경우는 극히 드물다. 천인이 공노할 일이기 때문이다.

    어느 임금님보다도 잔인했던 독재자의 딸이 어찌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것인지? 언제쯤이면 우리 국민의 의식 수준이 대통령 될 자와 되어서는 안 될 자를 가릴 수 있을 만큼 성장한다는 것인지 답답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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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혜 "국민들이 악인들이에요? 왜 아버지께 저항하고 그래요?"

     

     

     

     출처 : http://m.cafe.daum.net/mizesagun/NuhJ/123?q=%EA%B9%80%EC%82%BC%ED%99%94&re=1

     

     

     이게 나라냐

     

    작사 작곡 : 윤민석

     

     

     

     

     

     

     

     

     

    출처 : 죽마고우 사색공간
    글쓴이 : 죽마고우 원글보기
    메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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