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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를 낳은 상궁멋지고 귀한자료 2008. 11. 21. 14:53
대단한 배짱과 지략을 지닌 여인, 엄 상궁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죽은 뒤, 조선의 국모 역할을 했던 사람은 엄 귀비, 바로 엄 상궁이었다. 궁중에 살았던 여성들이 대부분 그랬듯이, 엄 상궁 역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그녀는 철종 5년(1854) 11월 엄진삼의 장녀로 태어나 5살의 어린 나이에 궁에 들어갔고 후에 명성왕후의 시위상궁이 됐다. 그러나 나이 32세에 고종의 눈에 들어 승은을 입자 명성황후의 진노를 샀고 궁궐 밖으로 쫓겨난다.
조선 최후의 48년의 파란만장했던 역사를 기록한 <남가몽, 조선 최후의 48년>은 엄상궁을 다음과 같이 얘기하고 있다.
“엄 상궁은 나이 다섯 살 때 궁궐에 애기나인으로 들어와서 커서는 황후의 시위상궁(侍衛尙宮)으로 승격한 궁녀였으나, 나이가 벌써 32세나 되어 고종의 눈에 들기에는 어려운 과년한 노처녀였다. 거기다 장 상궁(의친왕 이강의 생모)처럼 얼굴이 예쁘지도 못했다. 예쁘지 못했다기보다는 못생겼다는 표현이 훨씬 진실에 가까웠다. 그런데도 고종은 중전 몰래 엄비를 사랑하여 침소에 불러들여 잠자리를 함께 했던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민비에게 쫓겨났던 엄상궁을 고종이 즉각 불러들여 함께 살았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고종이 부른 것이 아니라 스스로 고종 앞에 나타났다. 생계를 걱정할 정도로 가난에 시달린 나머지 왕 앞에 스스로 나타나 왕을 유혹한 것이다.
다시 <남가몽, 조선 최후의 48년>을 들여다보자.
“엄 상궁은 중전마마가 생존해 계실 때 죄가 있다고 하여 궁궐에서 쫓겨났었다. 그 뒤로는 다시 궁궐에 들어오지 못하고 밖에 있으면서 한가롭게 지내고 있었다. 그런데 밖에서 생활한 두어 해 사이에 의식주가 곤란하여 동분서주하면서 생활이 매우 구차하였다. 그러던 차에 갑자기 곤궁(민비)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리하여 대궐에 들어가서 문상을 하게 되었는데, 그 뒤로는 자주 안 상궁이 거처하는 방에 드나들었다.
어느 날 상감께서 마침 엄상궁을 보시고 물으셨다.
“네가 엄 상궁이 아닌가. 근년에 왜 궁궐을 나가서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느냐?”
“자연히 궁궐 밖에서 생활하다 보니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지금부터는 궁궐 안에서 머무르고 밖에는 나가지 말라.”
그리고 며칠 후에 불러다가 동쪽에 있는 온돌로 된 지밀(至密) 방안에서 머무르게 하였다. 그런 뒤에 임신이 되어 아들을 낳았으니 그가 곧 지금의 영친왕(英親王 )이시다.
엄 상궁이 영친왕을 낳은 뒤에는 귀인(貴人, 內命婦의 종일품)에 봉해지고 경선당(慶善堂)에 거처하면서 왕실의 재산을 주관하게 되었으니 누가 세상만사 돌아가는 일을 미리 예측할 수 있겠는가.”
숙명, 진명, 양정학교를 세운 근대 교육의 선구자
32살이란 나이에, 그것도 다른 궁녀들에 비해서 잘 생기지 않은 용모로 어떻게 고종의 승은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뛰어난 지략과 대담한 배짱을 지닌 여인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생각컨대, 불면과 불안, 외로움에 시달리던 고종이 그 배짱과 지략을 높이 산 건 아니었을까 한다.
알다시피, 을미사변으로 중전을 잃은 고종은 심한 불면증과 우울증을 앓았다. 내심, 누군가 옆에 있을 사람이 필요했고, 그가 바로 엄 상궁이었던 셈이다.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던 고종은 궁을 벗어날 생각까지 했었다.
“엄 상궁은 며칠 전부터 심복 궁녀 하나를 대동하고 가마 두 채로 궁궐 출입을 했다. 일본의 서릿발 같은 감시를 피하기 위해 두 채의 가마로 궁을 드나들며 경계를 늦췄던 엄 상궁은, 1896년 2월 11일 대담하게 고종과 왕세자였던 순종을 가마에 태우고 러시아 공관(아관)으로 탈출에 성공한다.”
이 사건이 바로 그 유명한 ‘아관파천’이다. 아관파천은 엄 상궁이 러시아 공관과 친러파, 친미파와 은밀하게 연결하며 계획하고 실행했던 대사건이었다. 고종과 왕세자가 아관으로 탈출해버리자 일본은 당황했고, 이는 러일전쟁의 원인이 됐다.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를 낳다
엄 상궁은 44세라는 비교적 많은 나이에 아들을 낳았다. 그 아들이 바로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이자, 일본에 볼모로 끌려갔던 영친왕이다. 영친왕을 낳은 엄 상궁은 하루아침에 상궁에서 귀비로 신분이 상승했다. 바야흐로 엄 상궁 천하가 된 것이다.
한편, <남가몽, 조선 최후의 48년>은 영친왕의 탄생과 관련해서 재미있는 얘기를 하나 소개하고 있다.
“지난 8월 15일 밤에 하늘의 월궁(月宮)에서 부른다기에 따라 올라갔더니 금전(金殿)이 즐비하고 옥루(玉樓)가 높이 솟아 있는데 상제(上帝)를 모신 선관(仙官)들이 시립해 있었습니다. 그때 서늘한 봄바람이 불어오기에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중화전(中和殿)이 보이고 황금으로 경선궁(慶善宮)이라 썼습니다. 이 꿈은 확실히 엄귀인께서 생남(生男)하실 꿈입니다. 바라옵건대 해산 때 필요한 모든 물건은 소첩이 장만하여 올리려고 하오니 받아 주시도록 주선하여 주십시오.”
1907년 고종이 퇴위당하고 순종이 등극했다. 그러자 자손이 없었던 순종은 동생 영친왕을 황태자로 책봉했다. 그러나 그것은 영친왕에게 있어 불행의 시작이었다. 어린 나이에 볼모로 일본으로 끌려간 것이다. 이 일로 엄 귀비와 고종이 충격을 받은 것은 당연했다.
두 모자가 서로 그리워하다 잠 못 이루는 날이 많았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엄 귀비는 꿈에 그리던 아들을 가슴에 품고 죽음을 맞았다.
“신해년에 엄비가 무슨 병인지 점점 병세가 악화되더니 마침내 위독하여 회춘하기 어렵게 되었다. 하루는 창덕궁의 순종께서 어좌(御座)에 의지하여 앉아 계시는데, 엄비가 비단옷을 입으시고 옛날 모습 그대로 나타나셨다.
“소신이 이제 멀리 떠나게 되었사와 고별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잠시 문안드리고 갑니다.”
“영친왕이 현재 일본에 유학중이어서 서로 작별하지 못하고 떠나게 되니 그것이 한이 됩니다.”
“그러나 이미 황태자로 봉해졌으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황상(순종)께서는 특별히 형제간의 의리로 더욱더 서로 우애하시고 더욱 염려하시어 보호해 주시기를 천만 번 축원합니다.”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들어보니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깨어보니 꿈이었다.”
덕수궁에서는 즉시 일본 동경의 영친왕에게 전보를 쳐서 급거 귀국하게 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영친왕이 경선궁 빈소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았다. 이유는 혹시라도 순비가 전염병으로 죽은 것이 아닌가 우려해서였는데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너무 무자비한 처사였다. 당시 순비는 장티프스로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한 달이 지난 뒤 비로소 영친왕을 빈소로 들여보냈는데 통곡하다가 졸도하여 거의 정신을 잃을 뻔하였다. 이 때 좌우에서 지켜서고 있던 신하들이 효로써 효를 손상하지 말라(勿以孝傷孝)고 말렸다.
효로써 효를 손상한다는 말은 효도한다고 하다가 효 자체를 손상한다는 뜻으로 몸까지 상하면서까지 슬퍼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조선 왕조의 최후는 이처럼 애절하고 비통하게 끝났다. 누구 잘못으로 이렇게 되었는가? 하루아침에 망국한 책임을 누구에게 물어야 할 것인가? 누군들 자신 있게 ‘내게는 책임이 없다’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출처 : <남가몽, 조선 최후의 48년>
저자
박성수 지음
출판사
왕의서재 펴냄 2008.10.21 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조선 최후의 48년, 그 급박하고 숨가빴던 시간의 기록 『남가몽, 조선 최후의 48년』. 이 책은 고종과...
출처 : 아스라의 따뜻한 세상 만들기글쓴이 : 아스라 원글보기메모 :'멋지고 귀한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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