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인 수녀님의 詩

[스크랩] 순례자의 노래

한조각뜬구름 2011. 12. 17. 15:39





순례자의 노래
      글 : 이해인 클라우디아 수녀님 11월은 진정 순례자의 달입니다. 여행, 나그네, 이별, 죽음, 쓸쓸함, 낙엽이란 단어가 먼저 떠오르는 달. 서울에서 부산으로 내려오는 길, 16칸의 길고 긴 기차에는 승객들의 서로 다른 모습만큼이나 다양한 삶의 모습도 담겨 있었지요. 기차 안에 사람들이 너무 많이 탔을 땐 조용함을 그리워하지만, 사람들이 너무 없을 땐 사람들을 다시 그리워하게 됩니다. 어떤 누구에게도 어떤 장소에도 집착하지 않고 자유로이 갈 길을 가시는 주님의 모습, 저도 많은 이들을 골고루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싶습니다. 떠날 때는 떠나고 머물 때는 머무는 분별을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가을 바람이 부니 마음에도 삶에 대한 고운 갈망의 바람이 서늘하게 불어옵니다. 부디 시간을 아껴 쓰는 부지런한 순례자가 되게 하옵소서. 하루하루 해야 할 평범한 일과들을 소홀히 하지 않고 충실하게 최선을 다해 할 수 있는 지혜를 주옵소서. 삶은 견디는 것, 승리는 견디는 이의 것임을 날마다 새롭게 배웁니다. '그때가 바로 지금이라면....' 오랜만에 올라가본 묘지엔 물든 나뭇잎이 흩날리고 있었습니다. "죽음 준비 잘하세요! 아직 시간이 있을 때 더 열심히 살아요...." 무덤 속에 누워 계신 우리 수녀님들이 저에게 나직이 속삭이는 것만 같았습니다.
      제가 늘 마음놓고 들어갈 수 있는 하나의 집은 당신 뿐입니다. 주님, 오늘도 문을 열어주십시오. 평화의 길로 사람들이 지나갈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 길로 사람들이 지나갈 수 있기를 원합니다. 다만 하나의 밝은 길이 되기 위한 어둠의 시간들을 잘 견디어낼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늘 맑게 살기 위해서는 얼마나 깊이 깨어 있어야 하는지! 늘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는 얼마나 더 욕심을 줄이고 절제해야 하는지! 교만이 숨어 있는 율법보다는 비난을 받게 되더라도 겸손이 담긴 사랑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니고 싶습니다.
      주님, 오늘 하루도 새롭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수련생이게 하소서. 약간은 떨리는 수줍음, 순수한 눈빛을 잃지 않고 사랑하는 일을, 기도하는 일을 끝까지 계속할 수 있도록 함께하여 주십시오. 자신은 위선적인 행동을 잘도 하면서 다른 이의 위선을 못 견뎌 하는 위선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저의 위선이 느껴질 때 얼른 마음을 갈고 닦으며 기도에서 힘을 얻을 수 있는 지혜를 지니게 해주십시오.
      먹구름 속에서도 흰구름 속에서도 당신을 보고 듣습니다. 요즘으 유난히 구름이 많은 하늘을 보며 당신을 기억합니다. 주님, 저도 당신의 마음에 드는 구름, 이웃의 마음에 드는 구름이고 싶습니다. 제 삶의 길에서 이미 너무 많은 기적을 이루어주셨기에 다른 기적을 달리 청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하루하루가 은총이고 기적임을 살아갈수록 깊이 깨닫습니다.
      즉흥적으로 헛된 약속을 하고 감당 못하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도록 해야겠습니다. 약속은, 특히 말로 하는 약속은 가장 사려 깊고도 신중하게 할 것, 아주 작은 약속이라도 자기가 한 것에 대해서는 끝까지 책임지는 성실함을 지녀야겠습니다.
      저녁에 종종 흙 냄새 맡으며 잡초 뽑는 일을 하면 즐겁습니다. 제 마음의 밭도 그러할 테지요. 그날 그날 잘못된 것을 제때에 뽑아내면 덜 힘들겠지만, 무척 오랜만에 한꺼번에 뽑으려고 하면 얼마나 힘이 드는지! 현재에 대한 충실함이 가장 중요함을 풀을 뽑으면서 다시 생각합니다.
      '구하라, 찾아라, 두드려라!' 오늘 미사 중 마음의 샘에 고여오던 영적 기쁨을 그 무엇에 비길 수 있을까요? 대숲의 바람소리 같기도 하고 소나무숲의 초록 바람 같기도 한 그러한 기쁨, 예수와 성령께서 주시는 참 아름다운 기쁨.... 「향기로 말을 거는 꽃처럼」中에서
      수녀님! 사랑합니다

출처 : 민들레의 영토
글쓴이 : 티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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