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인 수녀님의 詩
[스크랩] 열매를 위한 꽃처럼
한조각뜬구름
2011. 12. 11. 12:44
열매를 위한 꽃처럼 글 : 이해인 클라우디아 수녀님 숨 막히던 불볕더위도 지나고 어느새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그토록 참을성 없이 덥다는 소리를 연발했던 일이 문득 부끄러워진다. 모든 계절이 그러하듯 여름도 이내 지나가 버리고 마는 것을 - . 한여름의 뜨거운 햇볕이 자연과 인간에게 베풀어 주는 혜택을 잊어버리고, 그저 덥다는 말만 습관적으로 되풀이하다가 여름을 떠나보낸 것 같아. 나는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드는 것이다. 계절의 변화를 통해 우리는 늘 보다 다양하고 새로운 모습의 자연을 접하게 되며 이에 따르는 마음의 변화도 시시로 체험하게 된다. 일 년 내내 여름만 계속되는 나라에서 몇 년을 살고 보니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에 사는 일도 내겐 더욱 새로운 고마움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한 계절이 바뀔 때마다 세월의 빠름을 새삼 절감하며 나태했던 지난날을 반성해 보기도 하고, 희미했던 삶의 지표를 제정립해 볼 수도 있으니 얼마나 은혜로운 일인가. "아니, 꽃 피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언제 이렇게 많은 열매가 달렸지?" "시간은 정말 빠르기도 하지. 난 그동안 무얼 했는지 모르겠다니까." 우리 집 뜰의 밤나무, 배나무, 모과나무 앞에서 저마다 한 마디씩 던지는 형제 수녀님들의 말 속에서, 나는 벌써 그윽한 가을의 향기를 맡는다. 해마다 가을이 오면 나는 열매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바친 꽃들의 죽음을, 그 겸허한 자아포기를 묵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열매를 먹을 때쯤 꽃의 존재는 아예 잊혀지기 일쑤지만, 나는 식탁에서 과일을 들 때도 꼭 한 번쯤은 그 과일을 위해 떨어져 간 꽃들의 고운 모습을 함께 떠올리며 고마워하게 된다. 나는 꽃이예요 잎은 나비에게 주고 꿀은 솔방 벌에게 주고 향기는 바람에게 보냈어요 그래도 난 잃은 건 하나도 없어요 더 많은 열매로 태어날 것예요 가을이 오면 - 김용석의 「가을이 오며」 내가 자주 애송하는 이 한 편의 동시가 절로 생각키우는 계절이다. 사랑하는 일에서조차 인색하고, 타산적이며, 자기중심적이 되기 쉬운 인간에게 이 짧은 시에서의 꽃의 독백은 '줌으로써 풍요해지는' 참사랑의 본질을 거듭 일깨워 준다. 꼭 생색을 내며 보답을 바라는 선행, 끝내 자기 뜻만 고집하는 편협한 사랑의 태도를 조용히 나무라는 꽃의 음성을 직접 듣는 듯하다. 이 세상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열매를 위한 꽃처럼 아낌없이 자신을 내놓는 사랑의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자녀에 대한 헌신적인 애정 때문에 자신은 한없이 잊혀지고, 작아지고 또한 초라해지기를 두려워 않는 부모들의 모습은 아름답다. 불우한 이웃을 위해 일생을 바쳐 봉사하는 선의의 많은 사람들, 그리고 학문'예술'신앙을 통해 세상에 빛과 사랑을 심는 이들의 모습도 아름답다. 숨은 꽃처럼 조용히 세상에서 물러나 살면서도 누구보다 뜨겁게 세상과 인간을 사랑하며 끊임없이 기도하는 수도자들의 모습 역시 아름답다고 말하고 싶다. 무관심과 이기심과 탐욕에서 벗어나 좀 더 이웃에게 눈을 돌리는 이해와 사랑의 사람이 되려는 용기. 이것이야말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하고 바람직한 용기가 아닐까. 이는 곧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이웃을 긍정하는 용기. 성실하고 아낌없이 자신을 꽃피우되 때가 되면 조용히 물러설 줄도 아는 겸손한 용기이다. 참으로 겸손한 자만이 사랑의 승리자가 될 수 있음을 열매를 위해 사라져 간 꽃들에게 다시 배운다. 산에서 내려온 맑은 바람 한 자락이 내 가슴에 들어와 시를 엮는 초가을. 나도 한 송이 꽃과 같은 겸손의 용기를 잃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겠다. 기도의 맑은 물로 마음를 씻고 서둘러 '사랑의 길'로 떠나야 겠다. 1985. 9「샘터」 「두레박」中에서 |